[국가인권위원회] 혐오의 말은, 나에게 돌아온다
- 2026-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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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를 겨냥한 신조어들은 처음에는 가볍고 유머러스한 표현처럼 소비되지만, 점차 특정 집단을 일반화하고 조롱하는 혐오의 언어로 굳어진다. 이러한 말은 일부의 행동을 전체 세대의 특징처럼 왜곡하며, 개인에 대한 비판이 아닌 집단 전체를 향한 공격으로 변질된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나이만으로 평가되고 낙인찍히며, 서로를 이해하기보다 거리 두고 배제하는 분위기가 강화된다. 결국 이러한 세대 혐오는 사회의 다양성과 공존을 해치고, 서로를 향한 불신과 갈등을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하는 것이 문제다.


부정적 시선을 양산하는 신조어
‘영포티(Young Forty)’라는 말을 처음 접했을 때, 좋은 의미라고 생각했다. 영어 단어 자체만 보면 젊게 사는 40대, 활기찬 중년을 뜻한다. 실제로 ‘영포티’는 2010년대 중반 마케팅 업계에서 ‘트렌드에 민감하고 젊은 감각을 유지하는 40대’를 가리키는 용어로 시작했다. 최근 들어 ‘영포티’는 온라인을 중심으로 ‘젊어 보이려 애쓰는 철부지 중년’을 비꼬는 조롱의 밈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각종 매체에서는 촌스러운 스타일을 강조하는 일러스트를 덧입히며 부정적인 인식을 부추겼다.
단순히 웃자고 만든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웃음 끝에 씁쓸한 뒷맛이 남는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서 특정 세대를 겨냥하여 조롱하는 신조어는 일종의 유희처럼 소비되기 시작했다. 노인을 비하하는 ‘틀딱’, 아이 엄마를 공격하는 ‘맘충’ 그리고 ‘영포티’가 있다. 세대 집단을 조롱하는 신조어는 등장할 때마다, 일부 무례하고 몰상식한 사람들에 대한 정당한 비판이라는 명분을 내세운다.

‘일부’가 ‘집단’이 되어버리는 오류
불만 자체가 완전히 잘못된 것은 아니다. 나이를 내세우며 부당한 혜택과 양보를 강요하는 노인이 있고, 아이의 잘못된 행동을 무조건 감싸주는 엄마와 아빠도 있다. 공공장소에서 타인에게 불편을 끼치는 사람은 분명히 존재하고, 이기적인 행위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문제는 비난의 화살이 향하는 방향이다. 특정 개인의 잘못된 행위를 넘어 그가 속한 집단 전체를 하나의 속성으로 묶어버리는 순간 비판은 혐오로 변질된다.
세대 혐오의 논리적 결함은, 일부의 행동을 집단 전체의 본질로 치환하는 오류다. ‘맘충’이나 ‘틀딱’ 같은 말이 일상의 언어가 되면, 해당 집단에 속한 개인이 아무리 예의를 갖추고 신중하게 행동하더라도 잠재적 민폐를 주는 존재라는 낙인을 피할 수 없다. 사회적 낙인은 특정 세대가 공적 공간에 존재하는 것 자체를 위축시키고, 결국 우리 사회가 품어야 하는 관용과 환대의 폭을 조금씩 갉아먹는다.
이제는 혐오가 아닌 환대의 언어를 고민해야 한다.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혐오의 언어
세대 혐오에는 다른 차별과 비교하기 힘든, 독특한 잔인함이 있다. 성별이나 인종은 스스로 선택할 수 없지만, 바뀌지도 않는다. 그러나 세대는 다르다. 우리는 모두 한때 아이였고, 지금은 청장년이며, 언젠가는 반드시 노인이 된다. 노키즈존을 열렬히 지지하는 청년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부정하는 것이고, 노인을 혐오하는 중년은 머지않은 자신의 미래를 공격하는 셈이다. 오늘 내가 무심코 허용한 혐오의 언어는 시간이 흐르면 반드시 나를 향해 돌아온다. 스스로 놓은 덫에 스스로 걸려드는 비극적인 부메랑이다.
누구에게나 돌아오는 혐오, 위험한 언어를 우리는 왜 멈추지 못할까. 아마도 복잡한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는 가장 ‘값싼’ 방식이기 때문이 아닐까. 개인이나 타인을 무시하고 차별하는 문제의 구조를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대화하는 대신, 특정 집단에 모든 책임을 전가하면 즉각적인 심리적 해소를 얻을 수 있다.
아이 그리고 노인을 대하는 방식은,
하나의 사회가 인간의 생애를 얼마나 존중하는지
보여주는 정직한 척도다.

세대에 대한 적대감을 버릴 때
하지만 세대 혐오의 대가는 혹독하다. 특정 연령대를 배제하는 공간이 늘어나는 것은 우리 사회가 ‘다름’을 견디는 근육을 잃어가고 있다는 위험한 신호다. 공공장소는 다양한 존재들이 섞여 지내며 서로의 다름을 조율하는 곳이다. 나와 다른 존재들 사이의 마찰과 불편함을 견디는 것은 공동체를 유지하는 기본 조건이다. 내 취향이나 편의에 맞지 않는 존재를 눈앞에서 치워버리려는 발상은, 공적 공간을 개인의 사적인 방으로 격하시킨다. 한 세대가 사라진 빈자리를 채우는 것은 타인에 대한 신뢰가 아니라, 서로를 향한 날 선 감시와 갈등이다.
우리가 만든 세대 혐오의 말들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자. 세대 혐오의 단어들이 겨냥하는 것은 개인의 무례한 행위나 잘못, 실수가 아니라 특정한 세대 전체다. 개인의 행위를 탓하는 게 아니라 한 세대 전체를 지워버리는 결과가 된다.
한 세대 전체를 조롱하고 배제하는 언어가 일상이 될 때, 우리는 서로를 시민으로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밀어낼 수 있는 잠재적 타자로 여기게 된다. 혐오의 시선이 쌓이면, 공동체는 서로를 향한 불신과 적대감으로 서서히 균열해 간다.
아이 그리고 노인을 대하는 방식은, 하나의 사회가 인간의 생애 전체를 얼마나 존중하는지 보여주는 정직한 척도다. 우리가 내뱉은 말들이 우리의 미래를 갉아먹기 전에, 이제는 혐오가 아닌 환대의 언어를 고민해야 한다. 우리가 아이에게 보낸 따뜻한 눈길과 노인에게 건넨 작은 배려는, 결국 시간이 흐른 뒤 우리 자신이 받게 될 대우이니까.
글_ 김봉석(문화칼럼니스트)
자세한 내용은 아래 링크를 참고해주세요.
https://www.humanrights.go.kr/webzine/webzineListAndDetail?issueNo=7612066&boardNo=761207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