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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2025.04.22] ‘트럼프 시대’ 한국, 자강전략 세우며 다자외교 확대 필요

  • 서대옥
  • 2025-05-12
  • 15

6·3 대선은 세계사적 대전환의 한가운데서 펼쳐진다. 지난 80년간 한국은 미국 주도 국제 질서에 순응하며 한-미 동맹을 기반으로 안보·경제·정치 등 시스템 전반을 운영해왔다. 문제는 지각판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다. 대전환기 한국호를 이끌려고 대선에 나서는 후보들이라면 현재의 변화를 직시하고, 격랑의 시대를 헤쳐나갈 외교·안보 비전과 전략을 제시해야만 한다.

동맹 구조 바꾸려는 트럼프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는 한-미 동맹을 비롯한 동맹 구조 자체를 바꾸려고 한다. 한국이 더 많은 비용을 부담하면서 중국 견제에도 앞장서라는 게 트럼프 행정부의 요구다. 이 압박은 갈수록 심해질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관세 폭탄’을 지렛대 삼아 한국으로부터 경제, 안보 등 전 분야에서 최대한의 양보를 받아내려는 ‘원스톱 쇼핑’ 구상을 밝힌 상태다. 두 나라가 이미 합의한 방위비분담특별협정(SMA)을 무시하고 한국의 분담금을 대폭 인상하라는 막무가내식 요구도 문제지만, 트럼프의 압박이 주한미군과 한-미 동맹의 성격 자체를 바꾸려는 미국의 전략 변화와 맞물려 있다는 점에서 상황이 더욱 심각하다.

피트 헤그세스 미국 국방부 장관은 북한 위협은 한국군이 스스로 대응하고, 주한미군은 중국의 ‘대만 침공’ 저지를 비롯해 중국 견제용으로 전환하는 내용이 담긴 ‘국방 잠정 전략 지침’을 지난 2월 중순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지침대로면 주한미군은 한반도에서 북한의 도발에 대응하는 붙박이 군대가 아니라, 대만 사태 등 유사시에 중국을 겨냥해 움직이는 신속기동군이 된다. 이른바 ‘전략적 유연성’이다. 이것은 한국에 ‘미국과 중국 가운데 미국을 선택하라’는 압박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안보를 미국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은 큰 약점이 될 수 있다.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 환수와 ‘자강’ 노력을 전제로 구체적 전략을 정교하게 준비하지 않으면, 관세로 압박하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밀려 안보 문제에서도 속수무책으로 미국의 요구에 끌려갈 공산이 크다. 보수 진영에서는 미국 요구를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지만, 이는 ‘달라진 미국’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위험한 주장이다.

장용석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객원연구원은 “트럼프 정부의 요구를 정면으로 거부하기는 어렵더라도, ‘전략적 유연성’ 등과 관련해선 우리가 세부적인 디테일을 잘 준비해서 미국 요구에 대응해야 한다. 무엇보다 전작권을 조기에 가져와 한국군의 독자적 작전과 전투 능력을 강화하는 ‘자강 전략’이 병행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경제와 안보, 첨단기술 경쟁이 얽힌 시대에 자강 능력은 군사 분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첨단 제조업 국가로서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한 정부 차원의 산업 정책, 미래 산업 육성을 위한 연구개발 역량 강화도 방기해선 안 된다.

윤석열 정부가 망쳐놓은 한-중 관계

윤석열 정부는 3년 임기 내내 중국과 불편한 관계였다. 12·3 내란 이후엔 ‘혐중 음모론’을 앞장서 퍼뜨려 양국 관계를 심각하게 훼손했다. 거칠어진 미-중 패권 경쟁은 ‘끼인 처지’인 한국을 더욱 곤혹스럽게 한다. 차기 정부로선 윤석열 정권이 남긴 외교 갈등을 수습하고 장기적 기준과 원칙에 따라 한-중, 한-미 관계를 관리해야 할 부담이 한층 커진 셈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요구에 따라 ‘친미 반중 노선’을 확실히 해야 한다는 일부의 주장은 시대착오적이다. 한국이 먼저 명확한 전략과 좌표를 세워야 한다. 이것과 다른 요구와 압박을 받는다면 때로는 중국에, 때로는 미국에 ‘아니오’ 할 수 있어야 한다. 트럼프 2기 행정부가 들어선 뒤 유럽연합(EU)과 일본도 미국 일변도 안보 틀을 벗어나 ‘자강 전략’을 서두르고 있다. 전문가들은 한국도 스스로 힘을 키우면서 유럽연합, 일본,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등과 연대·협력을 강화해야 한-미 동맹에서도 목소리를 제대로 낼 수 있다고 말한다.

김흥규 아주대 미중정책연구소장은 지난 14일 국회에서 열린 플라자프로젝트의 차기 정부 정책제안 토론회에서 “한-미 동맹만으로는 한국의 외교·안보를 해결해나갈 수 없는 시대가 왔음을 직시해야 한다”며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을 버텨낼 수 있는 자강책을 추진하면서 한-미 동맹도 일방적 의존 관계가 아닌 서로 도움이 되는 관계로 전환해야 한다. 중국, 러시아, 일본과의 관계도 전략적으로 관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대 국가미래전략원이 차기 정부에 제안하는 ‘대한민국의 강대국 전략’ 보고서도 참조할 만하다. 보고서는 한-미 동맹을 ‘핵심 동심원’으로 삼고, 유럽연합·일본과의 협력을 ‘주요 동심원’, 중국·인도·러시아·동남아 국가들과의 연결을 ‘외곽 동심원’, 중동·아프리카·남미 국가들과의 협력을 ‘경계선 동심원’으로 확장해가는 ‘동심원 다자주의’를 제시한다.

통일·비핵화는 장기 목표, 중단기 과제는?

남북관계 관리와 북핵 문제 해결은 차기 정부가 맞닥뜨릴 가장 큰 난제다. 북한은 핵·미사일 능력을 빠르게 강화하고 남과 북을 ‘두개의 적대적 국가’로 규정했다. 러시아와 동맹 관계를 복원하고 이를 바탕으로 ‘북·중·러’ 연대를 빠르게 구축하고 있다. 6·3 대선에서 정권 교체가 이뤄져도 북한은 이런 기본 전략을 바꿔 남북관계 복원에 적극적으로 나설 가능성은 낮다.

결국 차기 정부는 ‘통일’과 ‘비핵화’라는 장기 목표는 유지하면서, 중단기적으로는 안보 위협을 낮추고 필요한 대화를 재개하면서 남북관계를 관리·개선하는 청사진을 마련해나가는 게 현실적이다. 북·러 밀착으로 엄중해진 한반도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서라도 한-러 관계 개선을 미뤄둬선 안 된다.

12·3 내란 이후 중단된 정상 외교의 정상화를 위해 체계적이고 치밀한 준비도 중요하다. 한-미·한-중 등 양자 정상회담을 준비하면서, 올해 10월 말~11월 초 경주에서 열리는 아펙(APEC) 정상회의를 새 정부 글로벌 전략의 실행 무대로 활용하는 구상을 정교화할 필요가 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등이 이 회의에 참석한다면, 격변기 세계 질서를 새롭게 그려낸 장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차기 대통령이 풀어야 할 한국 외교의 과제는 어느 때보다 복잡하고 무겁다. 글로벌 지정학의 변화를 정확히 꿰뚫을 수 있는 넓은 안목과 현실주의적 냉철함을 유지하면서, 정교한 설계도와 능력 있는 외교안보팀을 준비해 국민 앞에 내놓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