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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인칼럼

은폐된 진실의 규명, 정의로운 응징, 용서와 화해, 그리고 구원의 문제

NEW 은폐된 진실의 규명, 정의로운 응징, 용서와 화해, 그리고 구원의 문제

  • 박성숙
  • 2008-07-16
  • 45734

문화예술은 사회를 반영하는 거울

  올해는 해방 60주년이자 광주민주화운동 25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다. 이런저런 기념행사들이 개최되었다지만, 그런 번다한 행사들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매듭을 맺고 새로운 시대를 열지 못한 것 같은 아쉬움을 털어 낼 수 없는 것은 왜일까 ?

  문화와 예술이 그 사회와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이고 그 거울이 망실되지 않았다면. 그 거울로 이 못내 털어내지 못한 아쉬움을 비춰볼 수 있을 것이다. 정치와 경제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최근 문화 분야, 특히 영상산업의 약진은 가히 놀라운데, 이는 산업적 성장의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우리 근현대사의 역동성과 질곡을 반영하고 재현해 내며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2005년 이 시점에서 제대로 맺고 풀어내지 못한 아쉬움을 비춰주는 두 편의 영화와 한 편의 방송 드라마에 주목해 보자. 4월 말 개봉된 <혈의 누>(김대승 연출)와 7월 말 개봉된 <친절한 금자씨>(박찬욱 연출), 6월부터 8월까지 12주 동안 방영된 KBS 드라마 <부활>(박찬홍/전창근 연출)이 그것이다. 이 두 편의 영화들은 상영관 박스오피스 1위, 비디오 인기순위 1위 등 개봉 당시나 비디오로 출시된 시점에서의 대중적 선풍을 일으켰던 것들이고, <부활>은 일명 ‘매니아’라 불리는 열광적인 시청자들이 자발적으로 인터넷을 통해 대대적으로 홍보 캠페인을 벌였던 드라마이므로 굳이 그 줄거리를 여기서 상세히 소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혹시 아직 보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면 인터넷에 들어가 검색 창에 그 제목만 쳐 보라.

  내가 이 작품들에 주목하고, 이들을 함께 묶어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이유는 이 작품들이 19세기 초 조선, 21세기 오늘이라는 약 200년의 시차를 뛰어 넘는 다른 시간과 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사회의 공공적 안녕을 위협한다는 범죄에 대한 사법적 응징이 진실되고 정의롭게 이뤄질 것이라는 신뢰가 무너져 버리자 사법제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사법제도 밖에서 사적(私的)인 규명과 응징을 자행하는 이야기하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개인의 잔혹한 복수극을 중심으로 권력과 법의 기반인 진실과 정의에 대한 문제, 염치 또는 양심의 고통, 용서와 화해, 그리고 구원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문제 제기는 진실의 규명을 토대로 한 용서와 화해라는 과거사 정리가 이뤄지지 못하고 사회적 정의에 대한 냉소가 팽배한 우리 사회의 현실을 생각할 때 안타깝게도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따라서 이 증후적인 세 작품의 성과는 오늘 이 시점에서 정치적, 사회적으로 매우 의미심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복수와 응징의 과정 ‘혈의 누’

  <혈의 누>는 신흥 부(富)에 대한 질시와 탐욕에 의해 무고하게 밀고당한 강객주 일가의 참혹한 죽음과 이에 대한 복수와 응징 과정을 미스테리 사극의 형식으로 풀어내고 있다. 이 영화에서 특히 주목하고 싶은 점은 국가 권력에 대한 두려움과 작은 욕심 때문에 진실이 아님을 알고 있으면서도 침묵함으로써 거짓에 동조했던 마을 주민들에게 염치를 묻고 있다는 점이다. 이 동조의 대가로 미쳐버린 한 노인은 스스로 벽에 머리를 찌어 자살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마을 주민들은 밀고자 중 마지막 인물이 밝혀지자 칼과 낫을 들고 나타나 이 자의 피로써 침묵으로 동조했던 자신들의 죄를 씻고자 한다. 이 때 하늘에서 쏟아지는 피의 비는 이들의 몸을 피로 물들이며 이들에게 염치를 묻는다. 살인사건을 조사하러 왔던 조사관인 원규는 미궁에 빠진 사건을 풀어가며 그 원죄에 자신의 아버지가 결부되어 있음을 깨닫게 되지만, 사건의 전모를 밝힐 중요한 증거인 직금도를 사건 현장을 빠져나오는 배 위에서 슬그머니 바다에 버린다. <혈의 누>에는 억울한 죽음과 피의 복수는 있지만, 진실의 규명과 정의로운 법의 응징 그리고 양심에 의한 구원은 없다. 아버지의 원죄를 규명해야 했던 상징적인 이름을 가진 원규가 그 죄를 은폐하기 위해서 버렸던 직금도가 바다에 떠내려가다 누군가에 의해 주워 올려져 그 암호가 해독되고 진실이 규명되는 <혈의 누> 2탄을 우리는 기다려야 하는가?

 

‘혈의누’의 2탄 ‘친절한 금자씨’

  다행히도 바로 이 문제에 관한 한 <친절한 금자씨>와 <부활>은 <혈의 누>의 2탄, 3탄과 같다. 유괴살해범의 철없는 협력자였던 금자씨는 그 살해범에게 자신의 아이가 볼모로 유괴 당하자 어쩔 수 없이 살인죄를 뒤집어쓰고 감옥에 갔던 피해자이기도 하다. 감옥에서 금자씨는 진실을 규명하고 복수를 하기 위한 치밀한 작전을 준비한다. 출소 후 금자씨는 일단 피해자 부모 앞에서 자신의 손가락을 절단함으로써 협력자로서의 죄를 속죄하고, 더 나아가 멀쩡히 살아가고 있는 진범을 납치하여 그에게 아이를 잃은 여러 부모들 앞에서 진실을 규명한다. 경찰이 진범을 밝혀내고 검찰이 법으로 응징하지 못한 이 유괴살인범에 대한 응징에 대해 피해 부모들 누구도 사법제도를 선택하려 하지 않는다. 사법제도를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다. 피해 부모들은 사형(私刑)을 감행하기로 합의한다. 진범을 밝혀내지 못했던 담당형사 역시 이 과정을 지켜보고 비밀을 지키는데 동조함으로써 사법제도의 무력함을 대변한다. 악에 대해 피의 응징을 감행한다고 해서 죽은 아이가 살아 돌아오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은 두려움에 떨며 피의 복수를 감행하고 살인의 공범이 되었다는 두려움과 양심의 가책을 안고 황황히 흩어진다. 진실은 규명되었고, 응징도 이뤄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금자씨가 평화와 안식을 얻을 수는 없었다. 그 구원은 종교 사제를 통해서가 아니라 버려졌던 어린 딸에게 속죄하고, 그 순결한 영혼의 용서를 받음으로써 이뤄진다.

 

구원과 화해까지 포함한 ‘부활’

  <부활>은 정계와 재계의 유력자들이 부정한 정경유착과 친구에 대한 질시로 그 사건을 수사하던 형사인 친구를 살해했던 20년 전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면서 죽어있던 진실이 다시 ‘부활’되는 과정을 그린 미스테리 멜로 드라마다. 이 드라마는 부정한 정경유착이 바로 경찰 및 사법제도를 무력화시키고 있음을, 살인 교사의 수족이 되었던 자들의 양심 고백이 진실 규명의 시발임을, 무력해진 사법제도의 안팎에서 치밀하게 공조해야 만이 진실의 규명과 처벌이 가능함을,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이나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자식이 없음을, 진실이 은폐된 채 거짓 행복이 가능하지 않음을 웅변하고 있다. 꼬리를 물고 계속되는 거짓과 복수의 악순환을 끊고 고통에서 벗어나 구원에 이르는 길은 먼저 양심의 고백과 진실의 규명, 그리고 이를 근거로 한 정당한 응징, 용서와 화해, 그리고 사랑의 힘이라는 <부활>의 메시지가 대중들의 열광적 지지를 받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용서와 화해는커녕 여전히 진실이 규명되지도 못한 채 해방이 환갑을 맞이하고 광주민주화운동이 사반세기를 맞이한 지금 정치와 사법제도보다 대중문화가 이룬 성과가 더욱 크다는 지금의 현실은 우리에게 좌절감을 안겨주는가? 아니면 희망을 안겨주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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