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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인칼럼

[MT시평]'나가수'와 절대우위의 망령

NEW [MT시평]'나가수'와 절대우위의 망령

  • 배안나
  • 2011-04-05
  • 29120

참으로 수년 만에 TV 앞에 앉았다. 나는 가수다(나가수)가 시작됐다. 이윽고 치열한 진정성이 몸서리치는 기쁨을 안겨주었다. 실업, 주거난, 고물가에 눌린 일상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행복했다. 나가수는 대중문화에 담긴 우리 사회의 저력을 확인해주었고, 동시에 이를 담아내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제도적 한계도 보여주었다.

나가수는 우리 대중문화의 속살을 드러냈다. 가장 놀라운 것은 다름, 도전 그리고 공감이었다. 록, 블루스, 재즈, 리듬앤드블루스, 뉴에이지 등 다양한 장르가 넘실댔고 두성, 비성, 가성, 후성, 샤우팅, 바이브레이션을 넘나들었다. 초절정의 진지함에서 립스틱의 색즉시공 공즉시색까지 그리고 땅이 꺼지는 비탄부터 하늘로 치솟는 환희까지 감정의 메뉴 역시 풍요로웠다. 탈락하는 순간 나는 가수가 아니다라는 정체성 상실의 지경으로 내몰리는 위험 속에서도 펼쳐진 명인들 간의 공감대 역시 훈훈했다. 공감은 방청객에게 그리고 시청자에게 고스란히 전해졌고 이는 다시 가수들에게 메아리쳐졌다. 관객들의 신뢰가 가득 찬 눈빛을 보며 공감의 창발(emergence)이 생겨났다. 삶의 무게를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다름을 담아낼 그릇을 갖고 있지 못함도 절실히 느껴야 했다. 바로 서바이벌이 문제였다. 서바이벌의 판단을 위해서는 우열을 따져야 하고, 우열을 따지자면 획일적이고 객관적인 잣대를 들이대야 한다. 허나 사과의 상큼한 맛과 배의 시원한 맛을 두고 어찌 우열을 논하랴. 당도를 재자면 설탕이 으뜸이다. 나가수의 명인은 한국의 대중문화 그리고 한국 사회가 이미 너무나 다양해졌음을 새삼 확인해주었다. 세대를 밑으로 내려갈수록 이런 모습은 더욱 확연해진다. 모두에게서 비교우위를 찾아볼 수 있지만 절대우위를 판단하기 어렵게 된 사회로 변모한 것이다. 경쟁과 시장을 강조하는 경제학에서조차 절대우위의 잣대를 폐기처분한 지 오래다. 시장이 생겨나고 서로 간에 협력이 이뤄지는 근본적 동인은 누구나 저마다의 비교우위가 있기 때문이다.

절대우위는 절대열위에 있는 사람의 불필요함을 말한다. 허나 비교우위는 절대열위에 있는 사람과 절대우위에 있는 사람 간에도 협력과 교환이 발생함을 말한다. 탈락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집에 손님이 올 때 부부가 일손을 나눈다면 일은 항상 빨라진다. 아이패드를 보며 창발을 논하지만 복잡계는 한 사람의 천재보다 다른 사람이 충분히 많을 때 창발이 생겨난다고 말한다. 같은 것들끼리 모여봤자 서로 간에 배울 것이 없기에 창조란 있기 어렵고, 다른 것에 대한 적대감과 동종교배의 퇴보만이 증폭될 뿐이다. 하지만 수능점수부터 학점, 학력, 출신학교, 경쟁우위로 이어지는 절대우위의 망령들은 한국 사회에 굳건히 자리잡고 있다. 절대우위의 잣대를 들이대는 한 죽음을 마주하며 삶을 산다는 고졸자 스티브 잡스의 진정성은 영원히 나올 수 없다. 중소기업의 대기업으로의 성장이나 지역발전이나 다양한 인재와 대학의 출현 역시 요원하다. 절대적 우열로 비교할 수 없는 다른 것을 비교하려는 산업화 시대의 어리석음은 이제 그만두어야 한다. 이대로라면 명인들의 눈물과 분노만이 남을 뿐이다.

대안은 무엇일까. 이소라의 멘트와 대중의 열광에 열쇠가 보인다. 경쟁은 필요하다. 그러나 명인들의 프로정신이 경쟁을 낳는 것이지 탈락이라는 정체성 상실의 위기가 경쟁을 낳는 것은 아니다. 비교우위의 세계에서는 진정성을 향한 자신과의 승패만이 있을 뿐이지 타인과의 승패는 불가능하다. 시즌마다 새로운 7명의 명인을 영입해 우리 대중문화의 풍성함을 함께함은 어떠할까.

[머니투데이 - 2011.0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