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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인칼럼

화성을 다시 생각해본다

NEW 화성을 다시 생각해본다

  • 배안나
  • 2011-11-14
  • 30308

지난 토요일 도시사회학 과목을 담당하는 최진호 교수의 요청으로 이 과목을 수강하는 학생들과 함께 오랜만에 수원 화성을 돌아보았다. 아침 10시 창룡문 앞에서 출발, 성곽을 따라 북문, 서문, 팔달산 방향으로 성곽을 한 바퀴 돌아오는 코스였다. 천천히 여유를 가지고 설명을 곁들이면서 동북공심돈, 연무대, 방화수류정, 화홍문을 살펴보고, 팔달산에 올라 서장대를 거쳐 남문인 팔달문으로 내려왔다가 시장을 지나 다시 성벽을 따라 창룡문 앞까지 약 3시간 동안 5.8㎞를 걸으면서 돌아본 답사였다.

 

절기로는 가을이 지나고 초겨울로 접어들 시기이건만 아직도 가을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가운데 걷기에 쾌적한 날씨였다. 다만 주말이다 보니 중국, 일본 등 외국인 관광객과 우리나라 초·중·고등학생, 관광객들이 몰려 혼잡하고 정신이 없었다. 또한 화성 최고의 자랑거리인 방화수류정, 화홍문, 남문인 팔달문, 남수문 등의 공사로 그 모습을 보여줄 수 없었던 것이 못내 아쉬웠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화성이 언제부터 이렇게 세계적인 관광지가 되었나 놀랍기도 하였다.

 

세계적 관광지 자리잡은 화성

 

우리나라에는 산과 구릉이 많아 예로부터 성을 많이 쌓았다. 성곽은 그 목적과 기능에 따라 수도나 지방 행정시설로서의 도성이나 읍성, 군사적 목적으로 축성한 산성이나 행성 등으로 구분된다. 그런데 ‘성’이 붙은 지명을 보면 경기도 안성·화성, 강원 고성·횡성, 충남 홍성, 전남 보성·장성·곡성, 경북 의성, 대구 달성·수성, 경남 고성과 대전 유성 등이 있다. 그 밖에도 낙안, 비인, 고창읍성 등은 규모는 작지만 현재까지 성곽이 잘 보존되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성’들은 대부분 행정지명으로만 전할 뿐이고, 실제로 현존하는 성곽들을 보면 군사적 기능을 지닌 산성들이 대부분이다. 산성이나 행성 등은 도성, 읍성에 비해 덜 파괴되고 훼손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1796년에 완공된 화성의 역사는 비록 짧지만 한양성, 평양성, 경주의 금성, 월성, 하남 위례성 등과 마찬가지로 수도인 도성으로 설계되고, 축성되었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실제로 정조는 처음 구상에서부터 완공, 그리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심혈을 기울여 이룩한 화성으로의 천도를 포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 누대에 걸쳐 왕권을 마음대로 주무르던 부패한 세도세력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길은 그것 밖에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화성속 정신·문화를 전하자

 

화성 탄생의 시발점은 정조의 아버지에 대한 배려와 사랑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 갇혀 죽는 그 기막힌 현장을 지켜본 10세의 어린 소년이었다. 살얼음판 위를 걷는 고난 끝에 왕위에 오른 정조는 아버지를 구할 수 없었던 안타까움과 죄책감을 ‘효’로서 갚고자 아버지 묘를 옮기기로 하고 수원부가 있던 화산 아래로 그 자리를 확정하였다. 이를 위해 그곳에 거주하던 백성들의 거처를 새로 마련해줘야 했는데 화성은 이런 사정들을 배경으로 조성된 성이었다. 따라서 화성의 내면인 정신은 부친에 대한 효라고 하는 가족애와 백성에 대한 사랑인 인간애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실제로 화성 축조과정을 보면 정조는 막대한 비용을 투입하여 석공, 미장이, 대장장이, 와공, 벽돌공 등 전문기술자들은 물론 뒷일을 하던 잡역부들에 이르기까지 빠짐없이 임금을 지급했다.

 

다음으로 더욱 뛰어난 점은 화성의 외면을 이루는 최고 수준의 실용성, 예술성, 다양성이다. 채제공, 조심태, 정약용, 김홍도 등 당시 최고의 행정가와 학자와 예술가들이 참여하여 이 성곽을 이루어냈다. 축성과정과 기술, 자재 등 모든 면에 이르기까지 세세한 내용들이 《화성성역의궤》에 글과 그림으로 기록되어 전함으로써 완벽한 복원을 가능하게 했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수 있었다. 화성을 다시 돌아보고 얻은 준엄한 가르침은 이제 성곽의 외면이 아니라 그 내면 속에 정신과 문화를 담아 전하는 일에 힘을 쏟아야 한다는 깨달음이었다. 그것이 바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주어진 몫이기 때문이다.

[경기일보 - 2011.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