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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인칼럼

[아침을 열면서] 발해는 우리들 안에 있다

NEW [아침을 열면서] 발해는 우리들 안에 있다

  • 배안나
  • 2012-01-09
  • 28896

926년 1월15일, 거란의 공격으로 발해의 수도 상경성(上京城)이 함락되었다. 그로부터 1천86년이 흘러 바로 며칠 뒤면 그 날이다. 비운의 마지막 왕 대인선과 왕족, 귀족, 관료 등 수많은 발해인들은 포로로 끌려가 뿔뿔이 흩어졌고, 200여년간 해동성국(海東盛國)의 명성을 떨치던 발해는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그들이 기록한 자료는 남아 전하는 것이 거의 없다. 최근의 지표조사나 발굴 등 작업을 통해 드러나는 유물, 유적들이 다소 있을 뿐 지금까지 알려진 발해 관련 내용은 ‘요사(遼史)’, ‘거란국사(契丹國史)’ 등 중국 측 사서에 전하는 불과 얼마 안 되는 분량의 내용이 전부이다.

 

 

발해에 대한 여러 의문들

 

 

이러한 연유로 발해 왕조의 건국과 멸망 등에 관한 의문들이 끊임없이 제기되어왔다.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大祚榮) 등 그 주체 세력의 정체는 무엇인가. 과연 발해는 고구려계 지배세력과 거란, 여진, 말갈 등 피지배 토착세력의 이중구조로 존재하였는가. 발해와 신라의 관계는 경쟁관계였는가, 적대관계였는가. 백두산의 화산폭발은 발해 멸망에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가. 나아가 발해 멸망 이후 요동(遼東) 만주일대, 송화강 하류, 흑룡강 동북 지역에 펼쳐져 있던 광활한 땅과 그 역사는 이제 더 이상 우리와 아무런 연고가 없는 것인가 등등. 수많은 질문에 대하여 답변해줄 준비와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오늘이다.

 

다행히 우리의 역사기록인 ‘고려사’에는 고려로 이주해온 발해유민에 관한 풍부한 사례들이 수록되어 전하고 있다. 발해 멸망 직전인 925년 9월에 100호가 이주해온 것을 시작으로 12월에 1천호, 934년에 대광현이 인솔한 수만 명이 몰려왔다. 그 이후 979년에 다시 수만 명, 1029년부터 1040년 무렵까지 수십 명에서 수백 명씩 집단적으로 이주해왔으며, 1116년과 1117년 2차에 걸쳐 1백 명 가까운 발해인들이 고려로 이주해왔다.

 

우리 안의 5%는 발해인

당시 고려 총 인구 210만명의 5%에 달하는 10만명 이상이 발해에서 이주해온 유민이었다. 이는 고려시대 400여년간 이주해온 중국계, 거란·여진 등 북방계, 몽골계, 동남아계, 일본계, 기타 서역(西域) 등 수많은 귀화인들 가운데 가장 큰 규모였다.

 

고려로 이주해온 초기 발해 유민들은 대부분 서북 지역에 배치되었다. 발해가 멸망한 후 거란의 압박이 차츰 심해지자 고려는 거란에 대한 대비책으로 발해 유민들의 거란에 대한 강한 적개심과 거란군과의 전투 경험을 이용하였고, 이것은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1019년 고려와 거란의 전쟁이 끝나면서 더 이상 효용가치를 잃게 된 이들 발해 유민들은 대부분 남쪽으로 내려가 중남부지방의 벽지 촌락마을에 살게 되었다. 발해 왕족인 대씨가 상주군 관내 영순현에 정착하여 살던 중 13세기 몽고와의 항쟁에서 그 후손들이 공을 세움으로써 비로소 영순 태씨로 그 존재를 확고히 한 것이다.

 

그 밖의 발해 유민들은 세월이 지나는 동안 자연스럽게 동화되면서 고려인이 되었을 것이다. 피부색이 서로 다른 귀화인의 경우라 해도 보통 5대가 지나면 귀화한 국가의 인종으로 완전히 동화된다고 하는데 발해인의 경우 유전인자는 물론 언어와 문화까지 처음부터 고려와 크게 차이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천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발해는 우리들 가운데 있게 되었을 것이다. 당시 총 인구의 5%라면 현재의 남북한 인구 8천만 중 4백만이고, 적어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안의 5%는 발해인인 셈이다.

 

지난 1994년 발표되어 엄청난 감동과 충격을 안겨주었던 서태지의 ‘발해를 꿈꾸며’는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진정 나에겐 단 한 가지 내가 소망하는 게 있어…’로 시작해 ‘나에겐 갈 수도 볼 수도 없는가 저 하늘로 자유롭게 저 새들과 함께 날고 싶어…’로 끝나는 그 넓고 푸근한 바다, 발해는 우리들 모두의 가슴 속에 살아 있는 것이다.


[경기일보 - 2012.0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