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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인칼럼

[칼럼] ‘건배’ 대신 ‘고정’

NEW [칼럼] ‘건배’ 대신 ‘고정’

  • 이지윤
  • 2013-06-17
  • 27832

법의학과 의사가 시신 한 구를 부검하는 데에는 몇 시간이 걸릴 뿐이지만, 의과대학 학생이 시신 한 구를 해부하는 데에는 몇 달이 걸린다. 오늘 해부가 끝났다고 시신을 다 쓴 것이 아니다. 시신을 덮개로 덮었다가, 다음 실습 시간에 덮개를 열고 이어서 해부한다. 이것을 몇 달 동안 되풀이하는 까닭은 시신의 작은 구조도 꼼꼼하게 찾아서 확인하기 때문이다. 시신이 몇 달 동안 썩으면 안 되므로, 해부학 실습실에 들어올 때 방부 처리를 한다.


방부 처리를 전문 용어로 ‘고정’(fixation)이라고 부른다. 살아 있을 때 모습으로 고정한다는 뜻이다. 시신에 주입하는 방부제를 고정액이라고 부른다. 고정액의 주된 성분은 포르말린이다. 포르말린은 살아 있는 사람한테 해롭기 때문에, 아주 묽게 만들어서 쓴다. 수백년 동안 이 고정액을 써 왔고 별문제가 없었다. 문제가 있다면 고정한 시신을 오래 만지는 해부학 선생(교수와 조교를 일컫는 말)부터 일찍 죽어야 할 텐데, 그렇지 않다.


어른끼리 만나면 서로 젊어 보인다고 말한다. 진짜 젊어 보여서 말할 때도 있고, 듣기 좋으라고 말할 때도 있다. 누가 나한테 젊어 보인다고 말하면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늘 고정액에 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고정액 덕분에 내 몸이 썩지 않으며, 따라서 젊음을 오래 간직할 수 있습니다.” 상대가 웃으면 마지막 우스갯소리를 던진다. “해부학 선생은 죽은 다음에도 썩지 않아서 반드시 화장해야 됩니다.”


시신을 고정하는 방법은 학교마다 다른데, 내가 속한 학교에서는 다음 방법을 쓴다. 먼저 넓적다리 앞에 있는 넙다리동맥을 드러낸다. 넙다리동맥은 살아 있을 때 맥박을 만질 수 있으며, 이것은 피부에서 가깝다는 뜻이다. 따라서 많이 해부하지 않아도 넙다리동맥을 드러낼 수 있다.


드러낸 넙다리동맥에 주삿바늘을 꽂은 다음에 고정액을 주입한다. 동맥과 정맥은 온몸에 퍼져 있으며, 모두 심장을 중심으로 이어져 있다. 따라서 넙다리동맥으로 주입한 고정액은 온몸 구석구석으로 퍼진다. 이때 넙다리정맥을 열어서 동맥과 정맥에 있던 혈액을 뺀다. 그 결과로 혈액이 있던 자리를 고정액이 차지하게 된다.


고정액이 온몸에 퍼지지 않을 때에는 시신의 일부가 썩는다. 해부학 실습실의 시신은 모두 기증받은 것이며, 이 소중한 시신을 제대로 해부하지 못하면 참 안타깝다. 잘 고정된 줄 알고 학생한테 해부를 시켰는데, 나중에 일부가 썩은 것을 발견할 때도 있다. 학생은 시신을 바꿔 달라고 요구할 수 있다. 그런데 시신을 바꾸면 피부부터 다시 해부해야 되므로, 그 조의 학생들은 서로 다른 의견을 낸다. ‘시간이 오래 걸려도 바꾸자’는 의견도 내고, ‘대충 해부하고 다른 조 시신을 잘 살피자’는 의견도 나온다.


이처럼 고정액이 온몸에 퍼지지 않는 첫째 까닭은 시신의 혈관 상태가 나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는 동맥경화다. 기름진 음식을 많이 먹고 게으르게 운동하면 동맥경화가 생긴다. 동맥경화가 심해지면 동맥이 막히고, 마침내 터져서 출혈을 일으킨다. 이처럼 혈관 상태가 나쁘면, 살아 있을 때 혈액이 온몸에 퍼지지 않아서 문제이고, 돌아가신 다음에는 고정액이 온몸에 퍼지지 않아서 문제이다.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라도 기름진 음식을 조금 먹고 부지런히 운동해야 될 것이다.


둘째 까닭은 잘 고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병원에 방사선사, 임상병리사, 물리치료사를 비롯한 의료 기사가 있듯이, 의과대학에는 해부학 기사가 있다. 시신 고정을 맡은 해부학 기사는 관련된 기술을 갖추려고 언제나 애쓰며, 시신이 들어올 때마다 긴장하고 정성껏 고정한다. 하지만 마음대로 안 되는 경우도 있다. 해부의 시작은 고정이며, 고정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과거 포르말린을 고정액으로 쓰기 전에는 알코올을 고정액으로 썼다. 초등학교 때 여름방학 숙제로 벌레를 채집한 다음에 알코올을 주입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알코올 중에서 에틸알코올(술)을 즐겨 마시는 해부학 선생이 꽤 많다. 그들은 술집에 모이면 ‘건배’ 대신에 ‘고정’이라고 외친다. 해부의 시작은 ‘고정’이고, 해부학 선생인 자신부터 ‘고정’해야 된다는 논리이다. 살신성인의 정신일까? 아니다, 술 마시고 싶어서 지껄이는, 말도 안 되는 핑계다. 해부학 선생은 포르말린 때문이 아니라 에틸알코올 때문에 일찍 죽기 쉽다. 해부의 시작은 고정이며, 고정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정민석 아주대 의대 해부학교실 교수

[한겨레 2013. 6.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