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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망각에 맞서는 기억의 투쟁

NEW [칼럼] 망각에 맞서는 기억의 투쟁

  • 이지윤
  • 2013-10-21
  • 27818

조지 오웰은 <1984>에서 “현재를 통제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최근 한국 정부와 대통령 역시 역사교육의 강화를 넘어 ‘균형 잡힌 역사교육’과 ‘올바른 역사인식 교육’을 역설하면서 오웰의 경구를 시연하려는 기세다.

아마 그 균형과 올바름의 배후에는 국사편찬위원장이 예전에 주장했듯이 후진국에서는 독재가 불가피하다든가 박정희 전 대통령이 독재자가 아니라 ‘조국근대화의 기수’ ‘보릿고개를 없앤 위대한 경세가’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국민에게 심어준 불굴의 영도자’ ‘양변기 수조에 벽돌을 넣어 절약정신을 실천한 청렴한 대통령’으로 기억되길 바라는 간절한 염원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선택적 취사와 왜곡, 기억의 조작에 불과하다. 미국의 사회학자 제임스 W 로웬은 역사교과서의 선별적 사실 편집과 부정확한 기술, 그에 근거한 공식 교육을 가리켜 “선생님이 가르쳐준 거짓말”이라고 일갈한다.

아무리 독재를 미화해도 그것이 국론을 분열시키고 후속 세대로 하여금 역사서술과 인식 논쟁으로 포장된 정치 투쟁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만든 과오를 지울 수는 없다. 또한 독재자들은 국내에서 지지 세력을 유지할 수 있을지언정 국제적으로 찬사의 대상이 되긴 어렵다.

20세기 후반의 가장 악명 높은 권위주의 체제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칠레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정권(1973~1990)은 군부쿠데타에 이은 집권과 정치적 탄압을 통해 안정적인 민주주의 전통을 파괴하고 후속 세대에 갈등과 국론 분열의 미래를 안겨주었다. 피노체트 장군은 철권통치로 반대자들을 양산해낸 반면, 1970년대에 일찍 도입한 신자유주의 정책과 경제 실적의 호조 때문에 국내외 기업계의 지지를 받았다. 퇴임 후에도 육군 총사령관직과 면책특권이 보장된 종신 상원의원직을 유지한 피노체트가 집권기의 인권유린 혐의로 1998년 런던에서 연행된 뒤 우여곡절 끝에 500여일 만에 칠레로 귀국했을 때, 공항에서 그를 기다리던 두 집단의 대조적인 모습은 칠레 사회가 겪어야 할 숱한 논란과 갈등을 예증하는 것이었다.

한국 사회 역시 군부독재가 남긴 내분과 갈등의 유산 탓에 심각한 후유증을 겪고 있다. 미화할 수 없는 기원의 정당성 결여를 업적의 정당성으로 덮어쓰려는 태도는 경계해야 마땅할 테지만, 군부독재의 지지자들은 그 시대를 성취와 보람의 역사로 찬양해 마지않는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민주적 절차와 내용의 파괴뿐 아니라 반대자들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공세와 낙인찍기, 대다수 생산계층에 대한 일방적 희생 강요 등 탈취, 고통, 좌절의 역사가 존재했다. 독재정권이 주도한 경제성장의 이면에 부정과 반칙의 선별적 용인과 향후 한국적 삶의 문법이 된 기회주의적 보신이 자리 잡았다.

또 독재정권은 불공정한 국정 운영, 강압과 동의의 교묘한 결합, 자기검열의 내면화 강제를 통해 경제성장의 열매를 과식한 강고한 기득권층뿐 아니라 무관심한, 실은 권력자들을 반대할 의사가 별로 없는 대중을 양산했다. 이는 불공정한 역사인식이 득세하고 그에 따라 국론이 분열되는 단초가 된 셈이다. 이들은 민주화 시대에 전개된 변화와 그 과정에 수반된 혼란에 대해 우려와 불안의 시선을 거두지 못하는 반면, 그토록 혐오하는 북녘의 체제와 외견상 별 차이 없는 옛 철권통치 시대를 전폭 찬양하곤 한다.

답답한 가운데 “권력에 맞서는 인간의 투쟁은 망각에 맞서는 기억의 투쟁”이라는 소설가 밀란 쿤데라의 말을 떠올려본다. 1980년대 초 어떤 가수가 애절하게 읊은 시월의 마지막 밤이 다가오고 있다. 가사의 한 대목처럼 우리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오래전 시월에 ‘칼로 일어선 자는 칼로 망한다’는 경구를 체현한 어느 독재자의 최후를. 그리고 난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전투 경찰의 군홧발에 짓밟힌 대학의 캠퍼스가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진 1985년 시월의 마지막 밤, 어느 대학의 건물에 갇혀 있던 1000명 이상의 학생들에게 ‘공산혁명 분자’라는 딱지를 붙여 연행한 1986년 시월의 마지막 밤을. 그때와는 한참 달랐으면 하거늘 공작정치가 난무하고 국론 분열을 조장하는 음침한 분위기, 시간이 필요한 때에 여전히 철권을 휘두르려는 심사가 엿보이기에 역사의 정체를 넘어 역류를 느끼게 되는 요즘의 현실도 누군가가 잘 기억하리라.

박구병 아주대학교 사학과 교수

[경향신문 2013.10.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