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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인칼럼

[칼럼] 지주막하강?

NEW [칼럼] 지주막하강?

  • 이지윤
  • 2013-12-16
  • 25535

의사의 중요한 일 중 하나는 환자한테 병을 알려 주는 것이다. 첫째 의사가 이렇게 말한다고 치자. “제부에서 촉지되는 연종괴가 허니아로 의심됩니다. 감별진단 후 외과로 전과하겠습니다.” 둘째 의사는 같은 내용을 이렇게 말한다. “배꼽 부위에서 만져지는 것이 바깥으로 튀어나온 창자 같습니다. 더 검사한 다음에 외과로 옮기겠습니다.” 환자는 둘째 의사의 말을 잘 알아듣고 따를 것이다. 실제로 의사가 환자한테 쉽게 풀이하면 병을 치료하는 데 도움 된다.

의사가 쉽게 풀이하려면 의학 용어가 쉬워야 하고, 의학 용어의 바탕인 해부학 용어부터 쉬워야 한다. 따라서 대한해부학회는 지난 25년 동안 어려운 해부학 용어를 쉽게 바꾸었다.

보기를 들면 다음과 같다. 상완→위팔, 관골→광대뼈, 슬관절→무릎관절, 건→힘줄, 구개→입천장, 소장→작은창자, 담낭→쓸개, 신장→콩팥, 안검→눈꺼풀.

이렇게 쉬운 새 용어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있다. 일부 의사가 싫어한다. 어렵게 외운 옛 용어를 버리기가 아깝고, 새 용어를 익히기가 귀찮기 때문이다. “슬관절 대신에 무릎관절을 써서 의사한테 이로울 것이 없습니다.” 나는 이렇게 대꾸한다. “세종대왕이 만든 한글은 양반이 아닌 평민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새 용어는 의사가 아닌 환자를 위한 것입니다. 환자를 위해 조금만 양보하십시오. 그런데 환자를 위한 것이 의사를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환자를 위한 의사한테 돈과 명예가 따르니까 그렇습니다.”

그리고 말을 덧붙인다. “법률가는 법률 용어를 쉽게 바꾸고 있습니다. 도과한→지난, 궐한→빠진, 개전의 정→뉘우치는 빛. 쉬운 법률 용어도 법률가가 아닌 비법률가를 위한 것입니다. 이처럼 어렵게 배운 전문 용어를 쉬운 말로 바꾸는 것은 기득권을 버리는 것입니다. 법률가보다 의사가 먼저 기득권을 버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다른 사람의 존경과 사랑을 받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나는 강의실에서 영어 용어로 가르친 다음에, 실습실에서 우리말 새 용어로 가르친다. 이렇게 따지는 학생도 있다. “아직은 쓸개라고 말하는 의사보다 담낭이라고 말하는 의사가 많습니다.” 나는 새 용어로 말하라고 구슬린다. “내가 어릴 때에는 기생충 없는 사람보다 기생충 있는 사람이 많았다. 그때에는 기생충 있는 것이 옳았겠냐? 많다고 꼭 옳은 것이 아니다. 많은 의사가 담낭이라고 말해도, 너는 쓸개라고 말해라.”

새용어로 가르치면 학생이 더 똑똑해진다. 옛날 해부학 시험에 이런 문제가 있었다. “지주막하강에 대해서 쓰시오.” 학생이 이렇게 답을 써도 점수를 조금 주었다. “거미처럼 생긴 막의 밑에 있는 공간이다.” 그런데 요즘에는 새 용어로 문제를 낸다. “거미막밑공간에 대해서 쓰시오.” 옛날처럼 문제를 풀어서 쓰면 점수를 주지 않고, 뜻있는 내용을 써야 점수를 준다. 지주막하강처럼 어려운 일본 한자를 외울 시간에 뜻있는 내용을 익히는 것이 나중 환자를 위해서 훨씬 낫다.

전국의 해부학 선생은 새 용어로 가르치고 있고, 따라서 의과대학 학생은 해부학 실습실에서 새 용어로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이 학생이 의사로 자리잡으면, 옛 의학 용어가 사라질 것이다. 그러므로 해부학 실습실은 새 의학 용어가 뿌리를 내리는 곳이라고 말할 수 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신문에 한자가 가득 있었기 때문에 고등학교에서 한자를 많이 외워야 신문을 읽을 수 있었다. 조선 시대에 양반만 글을 읽은 것과 비슷하였다. 다행히 요즘에는 한자가 사라져서 어린이도 신문을 읽을 수 있다. 중국, 일본에서 우리를 부러워하는 것 중 하나이다. 한자가 사라져서 잃은 것도 있지만 얻은 것이 훨씬 많다. 마찬가지로 새 의학 용어가 자리잡으면 얻을 것이 많다. 쉬운 말이 좋은 말이고, 좋은 말이 끝내 이긴다.

정민석 아주대 의대 해부학교실 교수

[한겨레 2013.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