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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듣고 싶은 명강의

2019학년도_입상_[영시와 대중음악]_유선무 교수

  • 박지원
  • 2020-02-24
  • 3959
문학을 통한 사회 통찰 (영어영문학과 선우은희)

   “사회의 권위, 가르침, 복종으로 정제되지 않은 내 안의 본연의 목소리, barbaric yawp은 무엇인가?... 나는 내 눈 앞에 보이는 현상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현상이 일어난 이유에 대해서 말할 수 있나?... 사회의 기저에 있는 cultural myth를 나는 파악하고 있나?...” 
   교수님께서는 문학이 현실 문제와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현실 문제를 진단하고 하나의 대안을 제시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인정하고, 문학과 우리의 실제 삶을 연관지어 생각할 수 있게 이끌어주신다. 때문에 이 수업을 들을 때, 매 수업 시간마다 나는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다. 마지막에 이르러 이 수업을 관통하는 하나의 질문이 있다면, “이 사회의 문화적 신화는 무엇인가?” 이겠다. 그 질문에 대해 답을 할 수 있는 방법을 한 학기 내내 배우는 것이 이 수업의 주된 목표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위의 질문 이외에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배우는 각 작품들이 무엇인지 설명하며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 수업에서는 대중문화, 즉 대중가요의 가사가 시와 비슷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대중가요의 가사를 마치 시를 분석하듯 분석한다. 2019년 2학기의 수업 중에는 총 7개의 굵직한 작품 혹은 비평문을 읽었으며, 자잘한 시나 내용 이해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짧은 설명글이 일부 있다. ‘Sings of Life in the U.S.A’의 서문, 19세기 미국의 유명한 작가 Walt Whitman의 시 ‘Song of Myself’, 1920년대 흑인 시인 랭스턴휴즈의 시에 관한 ‘Jazzing It Up: The Be-bop Modernism of Langston Hughes’ 미국 시민권 운동의 역사 ‘American Civilization Movement’, 흑인 갱스터랩에 관한 ‘Gettin’ Grown: Notes on Gangsta Rap Music and Notions of Manhood’, 1950년대 2차 대전 직후 혼란의 시기 Lost Generation의 알렌 긴즈버그의 시 ‘Howl’, 대중 음악가로는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 받은 밥 딜런의 노래를 분석한 ‘Bob Dylan and the Dialectic of Enlightenment’ 등이 작품 혹은 비평문의 제목이다.

   ‘Sings of Life in the U.S.A’는 Popular culture 대중 문화란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대중 문화를 분석할 수 있는 도구로 기호학을 적용한다. 즉 우리는 수업 1주차에 문화 기호학에 대해서 배운다. 소쉬르의 언어 기호학을 문화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이 롤랑 바르트이다. 롤랑 바르트는 모든 것이 권력의 구조라고 보았으며, 문화에도 그 이해관계가 반영이 된다고 보았다. 그로 인해 문화적 신화-cultural myth-가 유포되어, 우리는 때로는 인지하지 못한 채 대중문화에서 그러한 정치적 이해관계를 받아들이게 된다. 이 글에서는 cultural myth가 무엇인지를 중점적으로 배우며, 이 단어는 뒤의 6개의 글들을 모두 관통할 가장 중요한 주제이다. 이 글을 읽으며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나는 사회에서 유포하고 있는 가치 체계가 무엇인지, cultural myth가 무엇인지 알고 있나?’ 

   휘트만의 시 ‘Song of Myself’를 배운 이유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 가지는, 대중가요의 가사를 분석하기 전에, 어떻게 시를 분석하는지 그 방법을 매우 유명하고 잘 알려진 시로부터 배우는 것이다. 또 다른 한 가지는, 미국 백인으로 살았던 휘트만이 이 시에서 그리는 자신의 모습은 어찌보면 천상천하 유아독존과도 같이 이 우주의 가운데에 있는 것 같은데 이는 주류 사회에서 소외되었던 흑인과는 매우 상반되는 모습이어서, 이후 흑인들의 시와 극명한 대비를 보여준다. 그는 세상의 사물들과 생명체들이 평등하고, 모든 세상의 물체는 그를 통해 들어오고 그를 통해 나간다고 말한다. ‘I celebrate myself, and sing myself’, ‘Walt Whitman, a kosmos, of Manhattan the son’ 라는 시 구절에서 그를 알 수 있다. 물론 위의 두 가지 이유를 제외하고도, 그간의 시와는 다른 파격적인 형태, 육체와 정신이 하나라는 일원론, 나아가 본인 자신이 신과도 같다, 즉 신이 이 세계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시의 구절에서 알 수 있는 초월주의적인 면모 등 여러 가지를 배울 수 있어 매우 의미가 깊은 시였다. 
   나에게 가장 인상깊은 구절은 “I too am not a bit tamed, I too am untranslatable, I sound my barbaric yawp over the roofs of the world” 였다. 이 부분은 ‘죽은 시인의 사회’ 키팅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사용하여 학생들의 열정을 이끌어내는 데 사용하기도 한다. 휘트만은 이 시에서 그 자신을 믿으며 사회의 권위와 가르침과 복종을 거부하였다. 그리고 자신 안에 있는 거친 목소리, 사회에서 통제하고 정제하지 못했던 그 본연의 목소리를 듣고자 했다. 이 구절을 보며 나는 내 자신에게 질문했다. “내 안의 barbaric yawp 은 무엇인가?” 우리는 학교에서 교육받으며 사회의 가치 체계를 학습하였고, 사회에서는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것들, 마땅히 가야 할 길들에 대해 은연중에 가르친다. 나는 그 길이 벗어날 수 없는 늪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과연 그게 내가 원하는 삶이었는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내가 진정하게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1920년대 흑인 시인 랭스턴 휴즈는 Jazz의 특징을 시에 가미하여 넣었다. ‘Jazzing It Up: The Be-bop Modernism of Langston Hughes’은 재즈, 그 중에서도 새롭게 등장한 장르 be-bop의 특징과 랭스턴 휴즈가 새롭게 만든 모더니즘 시가 어떻게 유사하고 어떻게 다른지 비교하는 비평문이다. 그는 기존의 시의 형태를 변칙적으로 바꾸었고, 많은 흑인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로 시를 구성했다. 많은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는 제각각이고 서로 연결고리도 없지만, 그 모두가 흑인 커뮤니티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점이 일맥상통한다. 미국 주류 사회에서 소외되었던 흑인 랭스턴 휴즈의 가사는 휘트만의 시와는 꽤나 다른 분위기이다. 자신감 넘치고 강한 자아를 갖고 있던 휘트만과 다르게, 랭스턴 휴즈의 목소리는 위압적이지 않은, 자신을 낮춘 목소리이다. 인종 차별로 많은 상처를 받았음에도 그를 덤덤하게 풀어내는 목소리는 랭스턴 휴즈 시의 특징이자 많은 흑인 시들의 특징이다. 차별받은 이야기를 덤덤하게 풀어내기 때문에 시를 읽을 때 더 슬프다. 주류에서 벗어나 할렘에서 산 그의 삶은 대다수의 주류는 경험하지 못한 삶일 것이다. 주류와 비주류의 세계에는 장벽이 있지만, 랭스턴 휴즈는 궁극적으로 그 다름 속에서 보편성을 찾고자 한다. 나는 나에게 질문을 던진다. ‘나에게 진실인 것에 다른 이에게도 진실일까? 서로 다른 진실을 갖고 산다면, 우리는 영원한 평행선을 그리며 살까?’

   ‘American Civilization Movement’는 미국 시민권 운동의 역사에 대해 간략히 정리해주는 글이며, 이후 읽을 비평문, 흑인 갱스터랩에 관한 ‘Gettin’ Grown: Notes on Gangsta Rap Music and Notions of Manhood’을 읽는데 도움이 된다. 갱스터 랩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시피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가사가 특징인데, 미국 주류 사회에서 소외된 흑인이 그들을 위한 대안으로 제시한 것 중 극에 치우친 형태라고 한다. 흑인들은 주류 사회에서 배우는 백인의 모습과 다른 자신의 모습에 그 가르침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르침의 의도대로 자기 자신을 싫어하게 되는 정신적 식민지화를 겪고, 같은 흑인 집단 내에서도 갈등을 겪으며 –같은 흑인이 같은 흑인을 차별하는 경우가 그 예가 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미국 사회 내에서 소외가 된다. 비평문의 저자는 이 소외에 저항하고자 만들어 낸 갱스타 랩이 결국에는 미국 주류 사회의 남성성을 모방하면서 극대화한 것에 지나지 않은 폭력적인 남성성에 지나지 않았으며,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폭력적 특징과 같은 집단 내 여성을 비하하는 등의 점에서 그 대안이 실패했다는 진단을 내렸다.
   나도 거기에 동의를 하지만, 완전히 실패한 대안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폭력적인 대안이 나오는 이유는 그렇지 않고서는 우리의 이야기를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다, 사회는 여전히 변하지 않는다, 라는 절망에서 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공격성이 이슈를 불러 일으켰으면 관심을 불러 모으는 데는 적어도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다만 공격성이 대중의 공감을 받기 힘들기 때문에 그 방식이 오래 지속되지 못하는 듯하다. 그리고 더 생각해 보았다. 우리 사회에서 누가 소외되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누가 정신적 식민지화를 겪고 있을지. 사회적 약자로 분류되는 사람들 이외에도, 흔히 말하는 집단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사람들도 소외를 경험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더 나아가서, 누군가는 소외시키고 누군가는 주류로 편입시키는 이 ‘가치 체계’는 누가 만들었단 말인가? 그 가치체계가 우리는 과연 정당하다고 생각하는가?

   알렌 긴즈버그의 시 ‘Howl’는 형식이 자유롭고, 마약을 하고, 방탕한 섹스를 하고, 학교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행위로 자신들의 분노를 표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미치지 않고서야 이 세상을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알렌 긴즈버그는 밥 딜런과 같은 세대를 산 사람으로, ‘Howl’을 읽은 이유는 밥 딜런이 활동을 하던 시기를 이해하기 위함이었던 것 같다. ‘Bob Dylan and the Dialectic of Enlightenment’은 작가가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을 사용하여 밥 딜런의 노래를 분석한 비평문이다. 이 글이 담고 있는 수많은 이야기를 다 하지는 못하겠지만, 자본주의에서 나타난 분업이 인간을 전체 생산과정에서 소외시켰고, 전체-totality-를 보는 눈을 상실시켰다는 부분에서 느낀 점이 많았다. 부분을 보게 만드는 사회의 가르침으로 인해 전체를 보는 눈을 잃고 그 사회 안에 복종하듯 살아가는 모습은, 지금의 우리의 모습과도 크게 다른 점이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수님은 배움에서의 소외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셨다. 우리는 어렸을 적에는 새로운 지식을 배우는 것을 즐거워했는데, 지금은 그 배움이 오로지  나의 경제적 가치를 높이기 위함이기 때문에 그 배움이 전혀 즐겁지 않고 배움으로부터 소외되었다는 것이다. 나도 그와 별반 다른 모습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공부가 즐겁다는 이야기는 아마 공부하는 동기의 1할이 아닐까 싶다. 사실 좋은 학점, 참여를 통한 결과물들이 나의 가치를 높일 것이기에 계속 공부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외재적 요인이 학업 동기를 북돋울 수 있지만, 내재적 동기를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이 외에도 정말 많은 고민을 하게 만드는 이 글을 비롯한 다른 많은 작품과 비평문들을 다른 분들도 유선무 교수님의 ‘영시와 대중문화’ 수업을 통해 읽을 수 있으면 좋겠다.

   나는 2017년 입학 후 1학년 1학기에 유선무 교수님의 ‘영미문화의 이해’ 수업을 수강했다. 당시에 미국 독립 선언문, 오바마 전 대통령의 연설문, 트럼프의 연설문, 트럼프의 Immigration ban 법안, 지젝Zizek 스피치, 월가 시위에 관한 글, 오리엔탈리즘에 관한 글 등 강도 높은 글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스피치 날짜를 혼동하는 실수도 저지르고, 트럼프의 이민 반대법에 관해 모순에 가득 찬 3분 스피치를 하는 등 어설픈 점도 참 많았다. 호기롭게 수업을 들었는데 입학하자마자 장문의 영어 글을 읽기에는 수능 영어 실력으로는 부족해 거의 울 지경이 되어 상담을 받기도 했고, 영문으로만은 읽을 수가 없어 한글 번역본을 찾기 위해 열심히 구글링을 했던 기억도 난다. 하지만 그때 읽었던 글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너무나도 좋은 글과 교수님의 좋은 메시지를 배울 수 있었고, 그 때 서투르게 읽었던 글들을 졸업할 때에는 매끄럽게 읽고 싶다는 욕심으로 공부를 계속 했기 때문에 정말 많이 성장할 수 있었다. 
   지금에서야 깨닫는 것인데, 그 때부터도 교수님은 이미 문화 기호학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었다. 2017년 배웠던 지젝 스피치에서 이 사회 내부를 넘어서 보라는 메시지를 전했고, 2019년 2학기 영시와 대중문화에서 교수님은 계몽의 변증법에서 말하는 totality, 전체를 보는 눈을 기르라고 했다. 결국 내가 보는 진실이 정말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2017년에도 2019년에도 교수님은 미국의 광고를 보여주시면서 이 광고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학생들에게 질문했다. 광고에서 유포되는 문화적 신화, 이데올로기, 가치 체계를 학생들이 찾기를 바라셨던 것이었고, 2017년의 나는 그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2019년에 이르러 나는 그것을 조금은 이해했다. 2017년 교수님은 흑인 소년이 프랑스 국기에 경례하는 사진을 보여주며 이 잡지 표지가 의미하는 바를 생각해보라고 하셨고, 2019년에 롤랑 바르트의 신화론에 대해 간략히 배우며 예전에 보았던 그 잡지 표지가 롤랑 바르트가 자신의 문화 기호학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사진 ㅡ식민지에서 온 흑인 소년이 프랑스에 충성하는 사진을 통해 제국주의를 강화하고자 하는 가치체계의 유포ㅡ 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3년이라는 시간에 걸쳐 교수님 당신의 가르침을 이제야 깨닫게 된 것이다.
   2017년과 2019년의 이야기를 같이 한 것은, 그만큼 교수님의 수업이 일관성이 있다는 것을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교수님께서는 문학을 하는 사람이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 고민하시고, 문학을 배우는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깊은 통찰력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고자 하신다. 또한 전달하는 내용이 어렵고 난해하기 때문에 반복적으로 설명을 해 주시고, 우리 자신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질문을 항상 던지신다. 영문학 비평을 어떻게 하는지 그 방법에 대해서도 가르쳐주시기 때문에, 특히 비평에 관심이 있다면 정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영문학도로서 내가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어떤 강점을 가질 수 있는지 궁금한 학생이라면 유선무 교수님의 수업을 듣기를 추천한다. 아마 평생 곱씹으면서 살 수 있을 정도로, 굵직한 메시지를 마음에 담고 졸업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